색맹 디자이너.

어느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있었다. 이름은 에릭 킴 Eric Kim. 에릭은 한국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졸업했지만, 대학은 미국으로 갔다. 미국 명문대에서 컴퓨터 공학부의 석사까지 공부했고, 졸업 즉시 실리콘 밸리의 촉망 받는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으로 스카우트 되었다. 영어야 미국인만큼 구사할 수는 없지만, 프로그래밍의 세계에서 그런 게 무슨 상관. 그는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한국인 특유의 망설임 없는 야근정신으로 동료 프로그래머의 2배, 3배를 능가하는 퍼포먼스를 발휘했다. 덕분에 그가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도 당연지사. 입사 1년 만에 팀장급 직위에 발탁된다.

에릭이 팀장으로 발탁된 팀은 ‘유저 인터페이스 팀’이었다. 쉬운 말로 설명하자면, 소프트웨어의 사용자가 보는 화면(=인터페이스)을 디자인하고 개발하는 팀이다. 훌륭한 인터페이스를 만들려면 프로그래밍 실력은 기본이요, 미적 감각과 심리학적 지식마저 동원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보기에도 세련되고 사용하기도 직관적인 인터페이스가 탄생한다.

그러나 에릭에게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남에게 굳이 말한 적은 없지만, 그는 색맹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의 로고가 무슨 색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인터페이스란 다른 프로그래밍 분야와는 달리 시각적 디자인이 중요하다. 디자인에 있어서 색감이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도 색맹인 프로그래머가 인터페이스를, 그것도 팀장의 직급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과연? 귀머거리가 베토벤 5번 교향곡을 작곡하는 소리다. 에릭은 승진하게 된 것은 기뻤지만 색맹인 자신이 인터페이스 팀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민 끝에 그의 상사를 찾아갔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죄송하지만 저는 인터페이스 팀 팀장은 못 합니다.”

“갑자기 무슨 얘기야?”

에릭을 가장 믿고 그의 승진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상사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상사는 에릭이 입사 이후 얼마나 승진 욕심이 많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지만, 사실은 제가 색맹이에요. 코딩 하는 데에야 문제가 없지만, 색깔 구별도 못 하는데 인터페이스 팀은 아무래도 좀.”

그 말을 들은 상사는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으나, 곧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긴지 알겠어, 에릭. 색맹의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라니, 나도 들어본 적이 없네.”

“네.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승진은 없었던 일로 해도 좋아요. 기회가 된다면 다른 팀으로라도-.”

“아니, 그 말이 아니야. 에릭, 너는 예정대로 인터페이스 팀의 팀장이 될 거야. 다른 팀으로 옮겨지거나 승진이 취소될 일은 없어.”

“예?”

“잘 들어. 너는 프로그래머로서 팀장이 된 거야. 실제로 색을 칠하는 건 네가 아니고, 너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 팀원들이지. 너는 그들을 관리하고 그들의 결과물을 조립하는 역할이야. 알고 있잖아?”

“물론 알고 있죠. 하지만 제가 색맹이니 디자이너가 어떤 색을 칠했는지, 칠한 색이 적당한지, 제대로 검수를 할 수도 없고 피드백을 줄 수도 없습니다. 서로 보는 색이 다르니 논의조차 제대로 될 지 의문이로군요. 이래서야 팀장으로서 팀을 책임질 수 없어요.”

“내가 보는 색이 디자이너가 보는 색과 다르다, 나는 색맹이다. 그런 것에 주눅들 필요 없어. 색맹인 네 눈에도 괜찮게 보이는 인터페이스를 만들면 되는 거야. 색감에 예민한 디자이너도, 아예 색맹인 너도 만족할만한 그런 인터페이스. 더 좋은 일 아닌가? 네 덕분에 너처럼 색맹인 이용자도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인터페이스를 만들 수 있겠어.”

그런 대답을 들은 에릭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것도 일종의 역발상이라고 칠 수 있는 건가? 그냥 바보같은 짓 아닌가? 유능한 상사인 줄 알았는데 이상한 데서 완전 도라이인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불판 위의 개구리처럼 뛰어다녔다. 하지만 동시에,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승진을 반납하려는 자신을 믿고 말린 점도 고마웠지만, 무엇보다 그의 그 희한한 역발상이 고마웠다. 에릭은 색맹이라는 일종의 핸디캡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일평생 해 본 적이 없었다. 에릭의 상사는 요컨대, 평생 핸디캡인 줄 알았던 점이 사실은 장점이었다고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속는 셈 치고 그를 믿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않을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에릭은 그렇게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고, 상사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석 달 뒤. 회사는 에릭이 팀장으로서 이끈 팀이 개발해 낸 기술과 인터페이스를 자사의 서비스에 적용했다. 그리고 적용된 지 2주일만에 그 분야의 매출이 2배로 뛰었다.

*일단은 픽션으로 분류하긴 했지만 실화입니다.
실리콘밸리의 떠오르는 락스타이자 존경하는 선배인 에릭 킴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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