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토막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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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이라고는 했으나 나는 나름대로 긴 시간을 들여 ‘정의란 무엇인가’하는 고리타분한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마이클 샌델의 그 책이 유행하기 전부터, 아마 대학에서 프로파간다를 공부하던 무렵부터 정의란 대체 무엇일까 틈틈히 생각했었다.

오래 생각한 것 치고는 대답은 뻔하다. 절대적인 정의란 없다는 것이다. 정의란 대체적으로 과정 또는 결과에 대한 평등함을 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란 각자에게 합당한 몫이 돌아가는 것’이 유명하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의의 형이상학적인 정의定義는 사실 대동소이하기는 하다. 그러나 세부적인 기준은 조금씩 변해 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그것이 개인이 생각하는 정의든 사회가 지정한 헌법이든 말이다. 게다가 ‘정의란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것’같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기준으로는 실제 케이스에서 무엇이 정의고 불의인지 사람마다 해석이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황금해답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의로운 사람’ 역시 엄밀히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사실 살면서 자주 보는 인간군상은 진짜 정의로운 사람이라기 보다는 정의롭다고 본인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르는─본인들은 정의로운 행위라고 신봉하는─온갖 트롤링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종교적 신념(도그마)이나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심없는 믿음에 기반한 협소한 시야, 편협한 행동 따위다. 여기서 본인(과 본인이 속한 그룹)만이 정의롭고 그 외에는 전부 틀렸거나 미개하다는 믿음이 생기면 끝장이다. 그 믿음은 한 번 싹트면 게걸스럽게 자라나 순식간에 베어낼 수도 없는 바오밥나무가 된다. 소통, 이해, 관용을 거부하고 주장, 관철, 그리고 이른바 ‘계몽’에 집중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는 중독성이 있다. 중독된 정의를 끊기는 금연보다 어렵다. 담배와는 달리 정의에는 본인의 자아가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최선을 다해서 무슬림을 혐오하고 무의미한 키배에 기꺼이 뛰어든다.

결국 정의롭게 된다는 건 신기루에 불과하고, 필요한 건 편협한 정의에 중독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정의는 찾는 것이 아니라 경계하는 것이다.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는 것이다. 고로, 역설적으로, 그렇게 ‘정의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정의다. 정의로운 사람이란 즉, 본인이 정의로운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정의다.

다만 이게 아이러니한 게 ‘정의를 의심하는 것’이 정의라면 ‘그 정의’도 의심해야 하므로 모순된다는 건데, 아 하여간 그렇다. 정의가 어디 그리 쉽게 이룩되면 이런 고민도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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